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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대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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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1차대전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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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1차대전 종전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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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미국은 남북 전쟁 후에 재건이 시작되어, 산업혁명의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나는 세기의 문턱인 1896년, 숨 막히도록 빠르게 발달하고 있었던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급성장한 미국 상황만큼이나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어릴 적부터 시골 농가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머리가 꽤 컸을 땐 훌쩍 도시로 건너왔고, 정장을 입고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의 뒷일을 맡아했다. 그는 처음에 담배 심부름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엔 웃음 파는 가게에 있던 쥐 몇 마리를 잡는 일, 그 다음엔 전구를 갈아 끼우는 것과 같은 온갖 잡일을 맡아했는데 어느 날은 가게 앞의 노숙자를 쫓아냈다고 했다. 사람 하나를 내쫓자 그 다음엔 두 명을 쫓아냈고, 그 다음엔 더 여러 명을 쫓아냈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자 항상 담배 심부름만 시키던 클럽 주인은 그를 제 옆에 끼고 다녔다고 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키가 컸던 데다가 사람을 쫓아버리는 그 실력이 꽤 쓸 만했기 때문일 것이다.─나도 아버지의 그런 점을 빼다 박은 것 같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거라."
 
아버지와 대화를 끝마칠 때면 항상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아버지는 고향의 땅을 조금씩 사고팔며 재산을 불려나갔다. 그리고 커다란 농가 하나를 갖게 되었을 때 클럽 주인의 친구가 그에게 '공장을 짓고 싶으니 땅을 팔라'고 하였는데, 계약서를 쓰지 못한 일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 땅은 팔지 못했지만 그 땅에 공장 몇 개를 세운 아버지는 몇 년 후 번듯한 사업가가 되어 뒷일을 봐주던 클럽을 샀다고 했다.
 
지역의 이름난 유지가 된 아버지는 이제 명예를 좇았다. 미국은 계속 성장가도를 달렸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미국에 자리 잡기 위해 건너왔다. 그 중에는 나의 어머니도 있었다.
독일인이었던 어머니가 왜 미국으로 오게 되었는지 자세히 들은 적은 없다. 언젠가 ─아마 정말 어렸을 때─ 나의 물음에 그녀는 짧게 "희망이 있어 보여서"라고 대답했었다. 돌이켜보면, 그랬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아버지는 금발 미녀인 어머니에게 첫 눈에 반했다. 특히 그녀가 가진 문학적 지식은 그녀의 외모보다 더욱 아름답고 빛났다고 했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어머니에게서 매력을 느꼈다고 했지만, 그 한 마디를 제외하고선 모든 것이 어머니의 눈, 피부, 또는 향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했든 아버지는 그녀의 사파이어 같은 눈을 보느라 듣지 못했을 것이다.
 
로즈 베넷도 그랬다.
 
18살이 되던 해, 가고 싶지도 않았건만 '배워야 사람 된다'며 내 등을 떠민 아버지 덕분에 대학이라는 곳을 경험하게 되었다. 학문의 장 일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여유로운 환경에서 대학진학을 한 친구들은 술을 정말 좋아했다.
그래, 술을 정말 좋아했다.
 
우리는 진탕 마시는 걸 즐겼고,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에 취해 자제력을 잃었다. 친구들은 더러 강물에 빠지거나 되도 않는 내기를 하며 무모한 짓을 해댔다. 물살이 거센 계곡에서 노도 없이 보트를 타거나, 술에 절어 자전거를 타고 차도를 달리는 이상한 짓들이 대부분 이었다. 미쳤다는 소릴 듣는 이 시커먼 사내들 속에, 로즈 베넷이 있었다.
그녀는 매번 미친 사내들 틈에 끼어서 웃고 떠들었지만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녀의 소꿉친구였던 프레드가 한 번은 왜 술을 마시지 않느냐고 찌르자, 로즈는 자기 앞에 놓인 주스 컵을 꼭 쥐고 당차게 말했다.
 
"그건 내 목적이 아니라서말야."
 
바텀업을 하며 한 번에 주스를 들이 킨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를 보고 웃었다. 그 웃음이 조금 간지러워서 나도 입 꼬리를 올리곤 했다.
 
 
3학년이 되던 해부터 우리는 부쩍 가깝게 지냈다. 딱히 사귀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사랑이나 우정 같은 것으로 비유하기는 뭔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했지만─그녀가 내게 직접적으로 고백한 적은 없었으나, 나와 관여된 작은 것 하나까지 간섭하길 원했다.─ 본인은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미 내 친구들 모두가 그녀를 '로즈 콜리어'라며 짓궂게 놀렸는데도 말이다.
어머니와 동생은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밝은 미소에 구불거리는 금발, 발랄한 원피스를 입은 당찬 여자. 그녀가 웃을 때 보여주는 하얀 치아와 시원하게 웃는 붉은 입술은 누구나 사랑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노먼, 이리 와봐."

그녀가 집에 놀러왔을 때에도, 사실 나는 로즈보다 노먼에게 많이 신경을 썼다. 노먼은 나의 몇 살 어린 동생이었다. 하나뿐인 형제이자 내게는 선물, 그리고 가끔은 혹 같은 존재였다. 겨우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 주제에 아이같이 굴기도 했고─동생이라 그랬을테지. 조금 더 잘해줄 걸─그게 좋다가도 짜증나기도 했다. 하여간 정말 신기한 아이였다.
로즈가 어머니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면 나는 항상 노먼을 방으로 데리고 가서 친구들로부터 구한 책이나 신기한 물건 같은 걸 주곤 했다.

"형, 저번에 내가 말한 건?"
"이 안에 있지."

손에 가죽 파우치를 쥐고 보여주자 노먼이 손부터 뻗어 그걸 집어가려했다. 노먼보다 키가 커서 그런 그의 손을 따돌리는 건 참 쉬운 일이었다. 팔을 들어 올리자 작은 노먼은 내 손에 닿아보려 양 손을 뻗어가며 안간힘을 썼다.

"도니! 그만해!"
"노먼 콜리어. 형한테 버릇없이 굴면 이거 그냥 태워버릴 거야."

왼쪽 오른쪽으로 왔다갔다하느라 정신이 없는 노먼을 보니 볼 일이 급한 강아지 같아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럼에도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자 녀석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지 됐다는 듯 손을 내리고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좋아, 마음대로 해."
"아, 노먼. 미안. 진짜 웃겼다고, 너."

너무 웃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겨우 웃음을 털고 숨을 돌리자, 노먼이 내 방 침대에 털썩하고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나한테 형이 어딨어? 매일 밖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나는 말없이 그 애를 관찰했다. 성년이 된 지 벌써 몇 해인데 다른 녀석들에 비해 노먼은 여전히 아이 같았다. 그가 어렸을 때, 내가 양말을 신으면 저도 따라 양말을 신고, 축구를 하러 가면 공을 들고 쫓아왔다. 거의 항상 경기에 끼지 못하기 일 수였지만, 그러면 가져온 공을 품에 꼭 껴안고 내가 뛰고 있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노먼은 어머니의 눈과 아버지의 머리색을 물려받았다. 성격은 어머니의 복사판이었다. 어릴 땐 오히려 녀석이 형 소리를 들을 만큼 얌전하고 침착했다. 내 생김새와 성격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딱 반반씩 섞어 닮았다면, 노먼은 명백하게 어디가 참 닮았다고 집어낼 수 있을 만큼 판박이인 부분이 반반이었다. 창백한 피부 덕에 가끔 그 앨 snow white라고 놀렸는데, 녀석은 그 별명만은 정말 진저리나게 싫어했다. 나는 노먼이 질색하는 모습이 정말 좋았다. 거기에 웃으면 노먼도 잠시 후에 나를 따라 웃었다. 참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다 컸잖아."

내가 턱을 괴고 대답하자 노먼이 뒷목을 쓸었다.

"알아."
"네 친구들은 술 안 마셔?"
"응."

노먼이 힘없이 대답하며 다시 내 손에 쥐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웃느라 주저앉았던 다리에 힘을 주어 털고 일어나서 노먼 옆에 나란히 앉았다. 매트리스가 기울자 노먼이 내 옆에 딱 달라붙어 파우치를 내미는 내 손만 쳐다봤다.

"몹쓸 녀석들이네."

노먼은 얼른 끈을 풀어내고 파우치를 열었다. 그 안에는 토머스 하디의 The Return of the Native초판이 들어있었다. 삭아서 없어질듯 한 표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노먼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것 같았다.
 
-
 
 
“적당히 마셔.”
 
로즈가 가끔 내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게 무슨 술이었지? 기억도 안나는데, 어쨌든 그 때에도 나는 술병과 진하게 입맞춤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내게 잔소리 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정뱅이 같아!”
 
알고지낸 동안을 통 틀어 그녀가 내게 했던 최고의 욕이었다. 그런 말에도 나는 웃어댔고, 로즈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노먼, 너는 네 형처럼 이러지 마.”
“저 녀석 친구들은 다 샌님이야.”
 
또 한 모금 들이키자 로즈가 신경질 적으로 내 병을 빼앗아 탁자에 내려놓았고, 거기에 푸스스하고 웃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노먼은 내 분신이라도 되는 양 따라 웃었다. 주스 컵을 만지작거리면서도 다른 한 손에는 아까 내게 받은 책이 들려있었다.
 
“형처럼 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많아.”
 
노먼은 자랑스럽게 자신이 보던 책을 들어 올리자 로즈가 턱을 괸 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 볼 거면 여긴 왜 따라 온 거야, 둘 다?”
 
“감시.”
 
“약속?”
 
이해가 안 가는 상황에 다소 크게 어깨를 끌어올리며 의사표현을 하자 로즈와 노먼이 각각 대답했다. 로즈는 내가 전처럼 과음하고 계곡에 뛰어들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노먼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약속 때문에 나를 따라온 거였다.
 
“로지, 엄마처럼 굴지 마. 노먼? 넌 이런 곳에 같이 오기엔 아직 너무 순진해.”
 
“뭐?”
 
“형, 오늘 같이 시간 보내겠다고 말한 건 형이었어.”
 
다시 술병을 잡고 목을 축이는데 두 사람이 실망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술에 취하면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해대는 질 나쁜 버릇 때문이었다. 주정뱅이라던 로즈의 표현이 딱 맞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깨달은 후에야 나는 스스로 병을 내려놓고 딱히 할 말이 없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너무 취했나보네…. 알겠어, 집에 가자.”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나 잠깐 빌 아저씨한테. 먼저 나가있어.”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의 주인인 빌에게 천천히 걸어가자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재잘거리며 문 밖을 나섰다. 그 사이좋은 뒷모습을 바라보니 어딘지 모르게 가슴 언저리가 따스해져왔다.
 
“도널드, 웬 일로 오늘은 일찍 마치는구나.”
 
빌은 손에 들린 유리컵을 연신 닦아대며 먼저 말을 걸었다. 그의 손놀림이 마치 기계 같아 가끔씩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동네에서 가장 깨끗한 바를 찾는 이가 있다면 이 바를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그는 꽤나 깔끔을 떠는 사람이었다.
 
“그렇죠, 뭐. 흠. 제 친구가 부탁한 건요?”
 
빌은 내 질문에 주변을 살피며 가게 안이 꽤 시끄러운 것을 확인하곤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건너 아는 놈 중에 밀주사업을 하는 놈이 있어서 그 쪽에 얘기해놨어. 다음 주 쯤이면 될 것 같다.”
 
당시 미국은 금주법이 시행되기 직전이라 많은 술집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주말을 맞아 고향에 내려와 있었기에 다른 주의 금주법을 피해올 수 있었지만, 빌의 가게도 여차하면 간지러운 카페테리아로 바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니까. 독일 놈들 때문에 왜 나 같은 선량한 미국 국민이 피해를 봐야하는지, 원.”
 
그는 컵을 닦던 행주를 집어던지곤 정부를 비난하며 내게 스카치 한 잔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잔을 부딪치고 한 번에 그것을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목 넘김에 열이 머리끝까지 확 올랐다.
 
“아, 그러게 말이에요. 빌어먹을 금주법. 어쨌든 고마워요, 빌.”
 
마지막 잔으로 얼큰히 취해버린 나는 그의 말에 웃으며 돌아 나오다 발을 헛디뎌 뜻하지 않게 한 남자를 밀치며 엎어져버리고 말았다. 우지끈 하고 뭔가가 바닥에 세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이후엔 시끄럽던 빌의 가게 안이 적막으로 가득 차 공기가 차가워진 느낌이 들었다.
엎어진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데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 애송이가…”
 
상대방도 나만큼이나 술에 취해 불에 타는 듯이 벌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술을 마셨는지 분간을 할 수 없을 만큼 변화가 없었던 나는 그에게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양 손을 집어넣었고, 그의 붉은 얼굴이 우스워 웃음이 터진 것이었다.
하필 그 덩치 큰 아일랜드인을 보고 말이다.
 
“웃어?”
 
많은 표현이 담기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파악이 가능했던 그의 한마디에, 나는 저능아처럼 웃어대며 사과했다.
 
“미안, 미안해요. 난 그냥 좀 많이 취해서…”
 
“취했다고? 완전 멀쩡해 보이는데.”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밀치며 시비를 걸었다. 이미 술에 취해 이성이랄 게 없었던 나는 조금씩 얼굴을 찡그렸고 곧 그의 손을 잡아 쳐냈다.
 
“아, 왜이래요. 사과했잖아.”
 
예보다 더욱 벌게진 얼굴로 그는 나를 찬찬히 뜯어보곤 하지 말았어야할 말을 내뱉었다.
 
“너, 콜리어가 놈이군. 그 독일 돼지 자식.”
 
“…….”
 
내가 아무리 술에 취했다한들 내 가족을 모욕하는 말을 놓칠 리 없었다.
부모의 욕설에 반응하자 그는 점점 더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네 어미는 집에서 밀주 안 만들어? 너 같은 주정뱅이 건사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그 입 닥쳐.”
 
내 대답에 그는 더욱 신이 나 나불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신물 나게 비겁한 놈이었다.
 
“아니면 밀주 말고 다른 거? 하하!”
 
저급한 그의 말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옆 테이블에 있던 술병을 잡아채 그의 머리를 갈겼다.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노먼과 로즈가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그 아일랜드인이 피가 줄줄 흐르는 제 머리를 부여잡고 무릎 꿇는 것을 본 나는 얼른 그 둘을 다시 데리고 나와 빌의 차에 뛰어올랐다. 로즈와 노먼이 안절부절 하는 사이 덩치 큰 아이리쉬는 머리에 행주를 댄 채 제 동행과 큰 병 하나를 집어들고 문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뭐해! 얼른 타!”
 
결국 불안한 얼굴로 차에 오른 두 사람은 나와 그 놈을 번갈아 보며 차의 문간을 꽉 쥐어잡았다. 놈이 금방이라도 따라서 차에 오를까 싶어 얼른 엑셀을 밟아 빠져나가자, 멀어지는 빌의 가게 앞마당에서 분노에 찬 비명 소리가 들렸다.
 
“콜리어!”
 
“엿 먹어, 이 미친놈아!”
 
놈의 모습이 손톱만큼 작아졌고 나는 쾌재를 부르짖었다. 당황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로즈와 노먼도 피식 웃더니 이내 나와 함께 크게 웃었다. 검은 밤하늘에 쏟아질 듯 많은 별들이 도망치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노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여기 술이 엄청 많아.”
 
빌이 주류를 옮기기 위해 썼던 차였기 때문에 뒷좌석에는 그가 몰래 사들인 밀주가 한 가득이었다. 잠깐씩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많은 양의 병이 있었다.
 
“그래, 내일 빌한테 돌려줄거야.”
 
“괜찮은 거야? 그 사람 네 이름 알고 있던데.”
 
“이미 엎질러진 걸, 뭐. 아버지께 한소리 듣고 말겠지.”
 
내 대답에 로즈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역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니, 그의 입막음을 할 수 있을만한 돈도 있었다. 가끔은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가 걱정된다고도 했다.
로즈는 내 옆자리로 조심스럽게 건너와서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내 어깨에 제 뺨을 기댔다. 노먼도 짐이 실린 쪽을 빠져나와 빈 좌석에 조심스레 앉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내일 이 차 돌려주기 전에 호수에 가자.”
 
노먼은 바람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렸는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로즈가 어깨에서 떨어지자 그녀가 머리를 기대고 있던 내 얼굴에 제 왼쪽 뺨을 들이댔다.
 
“뭐라고?”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보다가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내일 이 차 돌려주기 전에…”
 
“돈!!”
 
노먼에게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로즈가 비명을 질렀고 몸이 붕 뜨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빌의 차는 하늘을 날고 있었고, 발에 닿아있어야 할 무언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등 하나 비춰지지 않는 늦은 밤의 산길은 별빛들과 그 자리를 맞바꿔가며 나를 어지럽혔고, 이내 차가운 진흙바닥에 머리가 처박혔다.
 
 
얼마나 지났던 걸까.
 
 
기억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 지지 않는 것이다.
 
차에서 튕겨져 나간 채 바닥을 뒹굴고 있던 나는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으려 눈에 힘을 주고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빌의 차는 처참하게 꺾어진 채 뭔지 모를 액체를 주르륵 쏟아내고 있었고, 형채를 알아볼 수 없는 핸들 옆으로 사람의 것이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은 하얀 것이 보였다.
빨리 일어나고 싶었지만 마치 땅이 나를 있는 힘껏 끌어당기는 기분이 들 정도로 내 몸은 무거웠다. 겨우 기어서 차 앞에 다르자 바닥에 엎어져있는 노먼이 보였다. 로즈는 차 안 쪽을 향해 엎어져 있었고, 노먼은 바깥쪽에 있었다. 얼른 노먼의 상체를 끌어당겨 얼굴을 쳐댔다.

“노먼, 노먼!”
 
노먼은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미 죽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아니야. 아니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물조차 나오질 않았다. 나는 다시 손을 뻗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로즈의 종아리를 잡아 흔들었다. 그녀의 다리가 너무 차가워서, 다시 떠올릴 때면 내 손 끝에 그 기억이 남아있는 듯하다.
 
“로즈, 로즈… 일어나. 부탁이야.”
 
그러나 그녀 또한 미동도 없었다. 나는 노먼의 머리를 껴안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곧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고 나는 그 상태로 기절했다.
 
 
 
 
-
 
 
 
돈!
 
 
돈, 얼른 일어나.
 
 
오늘 호수 가기로 했잖아.
 
 
 
“…어….”
 
노먼의 얼굴이 보여 눈을 떴을 때, 내 눈 앞에는 노먼이 아닌 어머니가 서 계셨다.
 
“…어…머니….”
 
거의 숨소리만 뱉어내듯 겨우 어머니를 부르자, 그 다음에야 어머니의 눈에 가득 차오른 눈물이 보였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병실을 나섰다. 시선으로 그녀를 좇자, 내 옆에 있던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도감이 있었지만, 거기엔 슬픔도 있었고 분노도 있었다. 또한 짙고 건강했던 갈색 머리가 회색빛이 되어 그의 상실감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
 
“…….”
 
그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며 천천히 병실을 나갈 채비를 했다. 나는 겨우 가눌 수 있었던 목을 내밀고 나에게서 도망치려는 그를 한 마디로 겨우 불러세웠다.
 
“노먼….”
 
동생의 이름에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 나를 보았다.
 
“노먼은요…?”
 
 
 
-
 
 
 
내 등에 생긴 화상 흉터는 꽤나 컸다. 어깨 안쪽부터 엉덩이 골까지 이어져 흉하게 일그러졌는데, 처음 나를 발견한 사람들 말로는 온 몸으로 동생을 껴안고 있었다고 한다. 차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엔진 폭발이 있었고, 차의 뒷좌석에 가득 실린 주류 때문에 2차 폭발이 빠르게 일어났다고 했다.
로즈의 시신은 1차 폭발 때 상반신이 많이 타버렸다고 했다.
 
화상 치료 때문에 노먼의 장례식에 갈 수가 없었다. 가고 싶었지만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장례식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어머니는 나를 잠깐 바라보았고, 그 짙은 사파이어 눈동자가 마치 노먼의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더 꾹 다물었다.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동안 병원에 오지 않으셨고, 사라 아주머니가 간병을 위해 나오셨다.
 
일주일이 지난 뒤 어머니가 다시 병원을 찾으셨고, 이틀 동안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 침대 옆에 앉아 가만히 계시거나, 간혹 물을 주시거나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셨다. 의사가 오면 그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시곤 했다.
 그러길 사흘 째 꺼내신 첫 마디는
 
“재판이 있을 거야.”
 
독일어였다.  
집에서 독일어로 대화하는 건 나와 어머니 뿐이었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영어가 미숙해서 간혹 독일말을 쓰셨다. 그 덕에 난 영어와 독일어를 모두 하게 되었고 가끔 고민이 있으실 때면 나에게 독일어로 말씀하셨다. 그건 마치 어머니와 나만의 암호 같은 것이었고,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맞춘 어머니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뜯었다.
 
“네 아버지가 애쓰고 있지만 잘 모르겠다는 구나.”
 
그 말에 나는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다시 나를 가엾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가여움과 두려움 또는 실망감이 섞인 어떤 것이었다. 너무 많은 것이 들어 감히 어떤 것이 들어있다고 다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복잡했다.

“…합당한 벌을 받을거에요.”

독일어로 답하자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넘쳐버린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 다리에 덮여있던 담요를 적셨다.
 
“…Ich vermisse ihn.”
 
마지막 말에 어머니는 견디지 못했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무너져 내렸다. 소리 없이 토해내는 울음이 내 귀에만 들리는 듯이 가슴을 찢고 상처를 후벼파는 듯 했다. 숨죽여 우는 어머니의 등을 감싸 안은 채, 나 또한 그제서야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


"돈 콜리어 씨."

비난으로 점철된 침묵 속에서 판사의 목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 보았다.

"당신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살인자에게 선택이라니?'
'바로 사형 아니었어?'
'어린 아일 죽였다고!'
'심지어 그 천사같은 아가씨도!'

"지금 미국의 상황을 알고 있을겁니다. 똑똑한 청년이니."

"……."

"나는 이렇게 하고 싶군요. 당신은 감옥에 가서 평생 죽음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조국을 위해 그 목숨을 바칠 수도 있구요."

"……."

"어떻게 하겠습니까?"

"……."

"콜리어 씨."

"죽겠습니다, 조국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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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은 제 추측일 뿐 자세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가 상상하여 쓴것이니 배경은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ㅜ_ㅜ

부족하지만 그리고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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